우리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언론의 보도들은 정말 정확하고 투명하며 공정할까? 우리는 많은 보도들을 접함으로써 사회의 흐름을 알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모두 옳은 보도였을까. 뒤늦게나마 언론의 실상이 밝혀지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의구심뿐이었다. 몰라서, 관심이 없어서 혹은 알고 싶지 않아서 잘못된 보도가 쏟아져 나와도 무관심하게 지나간 날들을 후회하며 언론조작이나 오보로 인한 대표적인 사례를 준비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광주의 상처부터 전 국민이 애도했던 세월호까지. 다시 되새기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보길 바란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 9·11테러와 이라크전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테러 단체인 알카에다가 미국 뉴욕에 있는 세계 무역 센터 빌딩에 비행기를 연달아 충돌시켰다. 공식 사망자는 2996명, 부상 6291명 이상을 기록하는 최악의 테러로 남은 9·11테러.
사건 당시 미국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는 사담 후세인 정권을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무법정권”이라고 매도하면서 테러의 주동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잡는다는 구실로 이라크에 공습을 개시했다. 또한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 언론은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9·11테러의 공범이기 때문에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대량 살상 무기는 발견하지 못했고, 이라크의 석유를 눈독 들이고 있던 연합국들이 참여한 이번 이라크전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른 집단안보를 위한 전쟁으로 포장되어 텔레비전이라는 대중매체를 이용한 여론을 조작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이라크전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라크에 대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그저 이라크전이 미국의 부시정부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미국 국민들은 무고하게 죽은 이라크인들의 영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이라크 전쟁은 세계에 미국의 힘만 과시한 전쟁이 되고 말았다.

 

숨기기 급급한 일본 언론 : 후쿠시마 원전 사고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을 관통한 대규모 지진(규모 9.0)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췄다. 당시 6기의 원자로 가운데 1호기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났고 뒤이어 3, 4, 5, 6호에서 수소폭발과 수조 화재 등으로 방사성물질을 포함한 기체가 대량으로 외부로 노출됐다. 그리고 고장난 냉각장치를 대신해 뿌렸던 바닷물이 방사성물질을 머금은 채 바다로 유입되어 해양오염 등으로 상황이 악화됐다. 이 상황 속에서 불안에 떨던 일본 국민들은 정부의 언론 조작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 방송에선 방사능 보도가 잘 나오지 않았으며 후쿠시마 원전이 정부 통제 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아베 정부의 보도만 있을 뿐이었다. 아베 총리는 후쿠시마에서 나온 문어를 시식하며 ‘안심하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으며 후쿠시마 방사능에 대한 피해도 축소해서 보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정부와 지차제가 후쿠시마현 주민들의 피해를 실제보다 적게 보이기 위해 조사 결과를 조작하고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것이다.
또한 해상오염은 물론 백내장, 갑상선암, 조산 등 각종 질병이 사고 후에 증가했으나 이에 대해 정확히 보도된 것은 없었다. 방사능으로 사망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보도도 없었으며 오히려 방송에서 후쿠시마산 음식을 홍보하기에 앞섰다. 하지만 홍보에 나섰던 일본의 연예인들은 내부피복판정을 받았으며 한 아나운서는 급성 림파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또 다른 공중파에서는 후쿠시마산 식품을 먹고 진행자 2명이 방사능 피폭판정을 받는 등 언론의 홍보와 국민들을 안심시키기와는 다르게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자꾸만 바뀌는 언론보도 : 4·16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 시민 총 476명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다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이로 인해 탑승객 295명이 사망했으며 9명은 생사 확인 불가, 생존자는 단 172명뿐이었다. 행복한 여행을 꿈꾸며 배에 올라탄 승객들이 공포에 떨고 구조를 기다리던 순간에도 언론의 보도는 허둥대기만 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탑승인원 파악과 구조인원의 집계를 잘못한 것이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462명이라고 밝힌 탑승인원을 477명, 459명으로 번복했다. 결국 사고 발생 12시간이 지난 후에야 탑승인원이 476명이라고 보도했다. 생존자 수도 368명이라고 밝힌 이후 착오가 있었다며 실종자가 290명이 넘는다고 보도해 혼선을 빚었다.
세월호가 침몰한지 이틀째인 18일 YTN을 시작으로 한국일보, 매일경제, JTBC 등 대부분의 언론이 “해경, 세월호 선체 진입 성공”에 대해 보도했다. 그러나 보도 2시간 후 해양경찰청은 구조대가 공기주입 사전작업은 했으나 선체 진입은 아직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구조요원 투입 시에도 언론 보도와 다르다는 실종자 가족의 말이 있었다. 언론 보도에선 함정 173척, 항공기 29대, 잠수요원 532명을 지속 투입했다고 했으나, 현장에 있던 실종된 단원고 학생의 이모부 오모(36)씨는 “아이들이 선내에 살아 있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들리는데 수색은 너무 더디다. 언론 기사를 보면 100여 명의 수색 인력이 투입됐다고 나오지만 실상 가보면 사람이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인터뷰 출처 – 한국경제)

 

우리가 폭도라고? : 5·18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당시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인 ‘5·18민주화운동’. 신군부를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이 국민들을 억압하고 계엄군은 시위대를 구타하고 찌르는 등 잔혹 행동을 벌였다. 이에 시위대는 광주 인근 시외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과의 총격전을 벌였다. 이때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겼고, 후에 탱크 등으로 무장한 계엄군의 대대적인 무력진압으로 시민군 전원이 연행되어 광주지역은 계엄군 손 안에 넘어갔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확인된 사망자 수는 193명(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이며 부상은 852명으로 확인됐다.
이에 관해 국내 언론 보도에서는 시위대를 ‘폭도’라는 표현에 빗대어 계엄군의 폭력을 그 속으로 감추어 버렸다. KBS1에서 보도된 내용 중에서는 ‘계엄군은 광주사태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전력경주,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광주사태는 악화되는 조짐이 보임, 시민 구출 위해 군병력 투입’등 독재의 잔혹한 현장을 단순히 폭도들의 난동으로 덮어버렸다. 하지만 외신의 보도는 달랐다.
CBS뉴스에선 ‘정부는 광주사태의 원인을 공산주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함으로써 시위가 계엄령 반대와 군부의 과잉진압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숨기려하고 있다’며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려 했으며 ABC뉴스에선 ‘전두환 장군과 소수의 선택된 장군들이 민간 정부를 완전히 무시하고 군사독재를 감행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 군사독재 가능성이 우려’라며 광주사태를 더불어 전두환의 군사독재를 예견하는 등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보도했다. 외신 보도 가운데 독일 언론인인 ‘위르겐 힌츠페터’는 당시 목숨을 걸고 광주로 들어와 계엄군에 의한 참사 현장을 기록하여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등 국내 보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을 보도하는 데 성공했다.

윤예린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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