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에 나오는 티토노스의 이야기를 아는가?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트로이아의 왕자인 티토노스를 영원히 사랑하고픈 마음에 그를 납치해 제우스에게 불명의 생명을 줄 것을 간청했다. 제우스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지만 티토노스는 죽지 않을 뿐 나날이 늙어간다. 불사의 생명과 함께 젊음을 함께 주라는 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티토노스는 한없이 늙어갔고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노년기에 완전히 짓눌려 ‘제발 이 영생을 거둬 가 주세요’라고 간청했다. “그는 들녘에서 죽을 능력을 가지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과 그보다 더 행복한 죽은 자의 무덤을 내려다보고 있다.” 결국 에오스는 힘없이 흐느끼는 그를 매미로 변하게 한다.

티토노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류가 정말로 원했던 것이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능력이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에서 삶의 저 밑바닥은 죽음보다 훨씬 불행하다는 것을, 어쩌면 죽음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것이 아닐까?

삶은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이 가진 본능적인 현상이고, 그 본능에 따라 인간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싸워왔다. 삶이라는 단어 자체가 죽음을 거부하거나 이겨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듯이 우리는 늘 죽음과 맞서 개인적인 차원이든 사회적인 차원이든 더 나아가 역사적인 차원이든 죽음과 맞서고 있다. 살아 있어야 무엇인가를 만나고,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슬퍼하며, 소위 살아있음을 느낀다. 반대로 죽음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이며, 경험하더라도 돌아올 수 없는 일방향의 것이고 그 길은 어둡고, 두렵고, 강제적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그 어두운 미지의 세계를 온갖 신화, 종교, 문학 등으로 표현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상상력일 뿐 죽음은 우리 앞에 놓여진 영원한 미지의 세계다. 인간은 특이하게 그 특유의 상상력으로 죽음의 공포를 가중시키고 때론 죽음에 대한 공포로 죽음 그 자체보다 더한 고통으로 삶을 연명하기도 한다. 에오스의 티토노스에 대한 죽음의 공포가 그의 삶을 죽음보다 비참하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는 많은 부분 상징적인 것이며, 심리적인 것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와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린 그 공포의 상징이 인간의 심리와 결탁하면 죽음을 연장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생명체의 원 목적인 삶의 의미는 잃고 만다. 그렇다면 동물들의 죽음은 어떠할까?

동물이나 벌레들 심지어는 세균, 박테리아까지도 그들의 삶 혹은 생존을 함부로 버리는 생명체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의 여정을 마친 동물들의 죽음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루살이라는 곤충은 그 이름 때문에 하루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불쌍한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생의 대부분을 유충으로 살다가 변태를 하여 성체가 되면 단 하루의 짧은 삶으로 생을 마친다. 그들에게는 입도 소화관도 없이 단 하루의 난교 파티를 끝내고 밤이슬과 함께 사라진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마귀의 동족 포식 이야기도 있다. 모든 사마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마귀의 암컷은 짝짓기 후 수컷을 잡아먹는다. 한 연구에 의하면 암컷에게 잡아먹힌 수컷이 자손 번성에 확실하게 기여한다고 한다. 수백 킬로미터를 거슬러 올라 알을 부화하고 며칠 안에 죽는 태평양연어는 어떤가? 확실히 동물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하진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어떠한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연스런 죽음을 미루고, 생명을 연장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원했던 질적인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일까? 사실 의료기술이 한사람의 생명을 1년간 연장시킨다 하더라도 정말로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몇 달이나 될까? 흔히 사람들은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부족한 면들을 채우려한다. 죽음이라고 하는 가장 어두운 면까지도 일단은 피하고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은 삶 혹은 죽음과 관련하여 오늘 죽지 않는 삶이 정말로 인간이 원한 근본적인 모습일까?

행복과학의 많은 연구원들은 두려움 혹은 불행을 피하는 것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이야기 한다. 죽음의 불행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결코 행복한 삶을 주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것은 두려움이라고 하는 긴 널빤지의 저쪽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특히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부족한 면들을 채우는 전략을 사용한다. 즉, 남들에 비해 적지 않는 돈을 벌어야 하고,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평균 정도의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자신이 정말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아야하기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즉, 모든 문제의 중심은 불행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것에 있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일단 그 중심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불행이라고 하는 넓은 널빤지 저쪽으로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행복은 오지 않는다. 다만 불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질 뿐….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 또한 부족한 면이 많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불행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불행의 저편이 아니라 행복을 직접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공포가 삶의 중심에 있게 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을 감사하고 즐길 뿐이다. 행복과학에 따르면 자신의 삶에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재미있고 자신 있는 일들을 찾고, 그것에 몰입하고,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추구한다면 완벽한 행복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일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말이다.

행복한 삶이란 살아있는 오늘, 즉 삶 그 자체를 중심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을 중심에 두는 것, 그리고 죽음을 피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지만, 그 두려움이 오늘의 삶을 지배하게 한다면, 당신은 아무리 생명연장을 한다고 해도 결코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죽음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불행이기 때문이다.

기초교양교육대학 최문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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