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스로가 선택해 태어나지 않았다.

반려견, 반려묘들 또한 스스로가 선택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적 생명을 책임진다는 의미를 잘 모를 시절에 데려왔던 고양이는 나보다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병원에 가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또 하나의 가족을 가슴에만 품어야 할 날이 떠오르고 조바심이 난다. 특히 기숙사에 사는 터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것과 일주일에 한 번 꼬박꼬박 집에 찾아가지 못하는 것이 나의 고양이가 내 곁에 있지 않을 때 두고두고 후회 할 일이 될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을 고양이와 함께하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작은 생명은 생각보다 더 사람과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오빠는 군대로, 나는 학업으로 한 번에 집을 나가게 되면서 부모님과 고양이는 빈자리를 두 배로 느껴야만 했다. 그도 사람처럼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우리가 우울에 빠질 때 대인관계를 피하듯이 고양이는 어두컴컴한 적막속에 머물며 이름을 불러도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평소와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은 놓였지만 쓸쓸함에 익숙해 지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에 죄스러움이 몰려왔다.
몇 주 만에 집에 돌아오니 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마중 나왔다. 밖에서 온갖 냄새를 묻혀왔기 때문에 그는 나를 찾기 위해 코를 박았다. 마침내 나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선다. 나를 보고 어색해 하는 듯 싶다가도 저녁이 되면 침대 머리맡으로 올라와 동그랗게 몸을 말아 눕고서 목을 울리며 그르릉댄다. 그럴 때면 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소중한 것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앞서 하며 고양이의 미지근한 콧바람을 맞았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을 하고 직장에서,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자리를 비우게 된다. 우리는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기 때문에 의무적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고양이의 죽음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 반려동물의 죽음으로 겪는 무거운 감정들을 이겨내고 일상을 이어가기란 잔인한 일이다. 그들도 우리의 가족이며 나의 분신이기도 하다.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음껏 슬퍼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누군가의 빈자리에 대해 수긍하기란 어렵다. 그렇게 비로소 그 자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끝이 있어야 소중한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끝을 대비하고, 미리 걱정해야 할 것이 아닌 마지막에 도달하기 전까지 충분히 사랑해야 한다. 앞으로 다 하지 못한 말이 없을 만큼 말하고 전하지 못한 감정이 남지 않도록 지금 존재하는 이 순간에 몰입하는 것이 떠날 사람에게도 남겨진 사람에게도 아름답게 끝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이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고 말씀하신다. 이제야 그 말이 사랑받는다는 걸 증명해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저 건강하게 곁에 있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만약 내가 고양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단 한마디만 해야 한다면 건강해 달라는 말을 전할 것이다.

존재 자체가 감사하긴 20년 인생 중 처음이었다.

/신예은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