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일기

0
146

아래 글은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학생의 일기와 유서 그리고 사례들을 바탕으로 각색한 글입니다.

‘우리는 민주화를 하자는 것이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민주 인사들을 구속시키다니 이 원통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소위 민주주의란 나라가 민주인사를 죽이다니. 이 같은 일이 세계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1979년 10월 27일
어제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상인들은 이를 기념하며 ‘무료로 커피를 드립니다’와 같은 행사를 열었다. 길거리는 유신체제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 피어 기쁨에 젖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를 체포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서울에서 난리가 난 것 같은데 무슨 일인가 싶다. 도대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1980년 5월 6일
전두환이라는 사람은 이전 정부보다 더 한 것만 같다. 시국을 수습하려 한다며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비상 기구를 설치했다는데 곧 전쟁이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다. 우리 대학에서도 또 다시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1980년 5월 15일
오늘은 원래 가족들과 꽃놀이를 가기로 한 날이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나는 낮 4시에 친구들과 함께 전남 도청으로 가서 시위를 했다. 지난 날 시위가 잊혀지지 않는데 또 다시 독재에 맞서 싸워야 한다니. 복학생인 정동녕이 시국선언문을 낭독했고 학교 측에서는 내일이라도 당장 휴교령이 내릴 경우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으로 모여 시위를 한 뒤 도청 앞 분수대에서 만나자는 공지를 내렸다. 오늘 열린다던 행사들은 전부 취소 됐다. 이 좋은 오월, 제발 전두환이 물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1980년 5월 17일
지금은 밤 10시이다. 그리고 한 시간 전, 전두환 세력의 압력으로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비상계엄령을 발표했다. 정신이 나간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 뉴스에서는 김대중, 김영삼이 체포, 감금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이긴 한데, 친구가 우리 대학 주변에 공수부대가 있다는 말을 듣고 9시가 조금 넘어 학교에 갔다고 한다. 그러고는 아니나 다를까, 공수부대에 의해 저지당했다고 한다. 그런 학생들이 늘어나 학교주변에서는 계엄령을 해제하라고 시위가 열린 모양이었다. 친구들이 나오라고 해서 나가려고 하니 부모님은 바깥 상황이 좋지 않으니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며 나를 말렸다. 괜찮다고 말하고 11시쯤에 학교 주변에 도착했다.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우글우글 거렸다. 공수부대는 어제 새벽 2시부터 있었다고 한다. 분노한 학생들은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을 던졌고, 돌에 맞아 부상당한 공수부대는 격분하며 들고 있던 곤봉으로 학생들을 때렸다. 순식간에 바닥에 나뒹굴며 피를 흘리는 학생들이 속출하자 갑자기 정문은 난장판이 됐다.
나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일어난 금남로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쪽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금남로에는 학생 말고 일반 시민들과 어린 아이들도 함께했는데 시위 규모가 줄어들지 않자 공수부대는 무차별적이고 난폭하게 시위대를 압박했다. 나 역시 곤봉으로 맞고 군화에 짓밟혀 다리를 다쳐 걷기도 힘들고 광대가 부르텄고 오른쪽 눈에 멍이 들어 퉁퉁 부어올랐다. 정신을 겨우 잡고 바닥에 누워있었는데, 도로 위에 보이던 군인이 택시를 강제로 멈추더니 이내 타고 있던 어린 부부를 끌어내려 몽둥이로 마구 때리고 발로 밟는 게 보였다. 그 여자의 옷이 갈기갈기 찢겨서 맨 몸이 다 보였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피를 흘리며 오열했다. 같이 있던 남자 역시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지만 공수부대는 빨리 꺼지라고 소리를 치던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친구에게 들은 소식인데 광주 동아일보 총무가 업무를 보다가 군인 두 명에게 붙잡혀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정신이 나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땅바닥에 머리가 박혀 질질 끌려갔다고 한다. 전남 지방 주변으로 군대가 포위해 우리는 더 이상 도망 칠 곳도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다고 한다. 상황이 너무 심각한데, 다른 지역 국민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겠지? 일기를 다 쓴 후 부산에 살고 있는 이모에게 편지를 쓸 예정이다. 근데 얼핏 들은 이야기지만, 타 지역으로 보내는 우리 편지도 검열당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방송에서는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로 앞당긴다는 말이 흐르고 있다.

1980년 5월 19일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창이 입원을 하여 병문안을 갔다. 어제 광주일고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공수부대들에게 잡혀 맞았단다. 때문에 췌장이랑 비장이 파열돼 중태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병원에서 나와 친구와 금남로로 향했다. 어제보다 시위자가 많아 대규모 시위가 됐다. 천 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하는데,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원들이 3명에서 4명정도 한 조를 이뤄 골목 구석 구석을 다니며 시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곤봉으로 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남로는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수 없이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공수부대는 하다하다 총부리까지 들이민다. 이럴수록 국민들의 분노가 커진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내일도 아마 오늘처럼 시위가 이뤄지리.

1980년 5월 20일
10시 반쯤에 가톨릭 센터에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길거리에 끌려나와 공수부대의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시민과 공수부대의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택시와 버스가 금남로에서 도청으로 이동하며 경적 시위를 진행했다. 길거리가 경적 소리로 가득했다.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이 역시 저지를 당했다고 한다. 나도 바깥으로 나가 시위대를 따라 도청으로 이동했다. 근데 충장로 쪽에서 택시와 일반 차량에 의해 가로막힌 공수부대, 경찰들이 대치하며 상황이 안 좋았는데 시위대 버스가 경찰들을 향해 돌진하면서 경찰 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위하는 사람 들의 말을 들어보니 광주 MBC에서 우리의 상황을 왜곡해 보도했다고 한다. 화가 난 사람들이 광주 MBC로 갔는데 그 건물에 불을 지른 것 같다. 그리고 광주역 부근에서는 계엄군이 총을 발포해 일반 시민들이 사망하고 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같은 나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죽이고 싸워야 한다니. 애통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미 내 눈에 그들은 우리 국민이, 아니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1980년 5월 21일
새벽에 시외로 하는 전화선이 끊겼다. 이제 더 이상 이모에게도 연락할 방법이 없다. 오전 10시경에 시위가 이뤄지는 도청을 향해 갔다. 지난 밤, 시위대는 광주 KBS에 불을 지른 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과 장갑차를 빼돌려 광주시내로 왔다고 한다. 공수부대들은 지난날과 다르게 눈에 띄게 많아졌고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계속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하는데 어젯밤 빼돌린 듯한 장갑차 한 대가 도청으로 갑작스레 들어왔다. 그리고 그 장갑차가 들어온 순간, 총을 들고 있던 공수부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앞에 서있던 사람들은 피할 틈도 없이 총알을 직격으로 맞고 쓰러졌다. 공수부대들은 높은 건물에도 들어가 위에서 우리 시위대를 향해 조준을 계속했다. 우리는 시위를 할 틈도 없었다. 심장이 엄청나게 빨리 뛰고 다시는 부모님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치자 살면서 느껴본 적도 없는 공포감이 몰아쳤다. 나는 그 곳에서 도망 칠 수 없어 사람들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려 도청 안으로 들어가 몸을 피신 중이다. 공수부대는 없는지 고요하고, 바깥은 오후에 총을 맞은 사람들과 그 피로 가득했다. 차라리 밤이 너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1980년 5월 22일
책상 밑에서 쭈구리고 잠을 자니 온 몸이 다 저릿했다. 집으로 가고 싶지만, 이미 바깥은 계엄군이 점령하고 있어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나갔다가는 곤봉이든 총이든 뭐든 간에 맞아 죽을 것이 분명했다. 하늘에는 헬기가 날아다니고 우리를 향해 하는 말인지, 폭도들에게 알린다며 뭐라고 방송을 했다. 곳곳에 부상자가 속출한 탓인지 적십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을 부탁한다고 했다. 나는 도청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와 검은 리본을 함께 반기 게양했다. 너무 슬퍼 눈물이 났고, 어제보다 더 가족의 품이 그리웠다. 오후부터 저녁까지는 계속 도청 광장에 시위대의 시신이 오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나도, 그들도 아직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청 안에 있는 나와 같은 또래 아이들과 함께 묵묵히 눈물만 흘린 밤이다.

1980년 5월 23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시민들에게 협조해주길 바란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일까 엄청나게 많은 시민들이 도청광장 앞에 모였다. 아직 집까지 갈만큼 포위망이 풀린 것이 아니다. 나도 그냥 광장에 머물러 있었는데 광장 주변에 지난 날 사망자 명단과 인상창의가 벽에 붙었다. 사진들을 보니 어른들도 많았지만 같은 또래들과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많았다. 분명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밥 먹다가, 집에 가다가 진압당해 맞은 아이들도 있으리라. 마음이 눅눅히 젖는 날이다.

1980년 5월 24일
아직도 도청에 갇혀 있는 셈이다. 도망칠 수 없다. 바깥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 같은데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고, 곧 계엄군이나 공수부대가 들이닥쳐 나를 고문장으로 끌고 갈 것만 같아 무서울 따름이다. 오늘따라 몸에 힘이 빠진다.

1980년 5월 25일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무섭고 힘이 없다. 몇몇 사람들은 탄약고에서 총과 무기들을 훔쳐 각각 가져갔다.

1980년 5월 26일
어떤 청년이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이른 아침, 화정동부터 농촌진흥원까지 계엄군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마도 시위가 이뤄지는 도청이겠지.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들이 시내를 진압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농성동 쪽에서 행진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다고들 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총과 칼을 들고 얼마든지 그들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걷는다니. 공급된 식량을 쪼개 먹는데 시민군이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고 싶지만 시내 연락조차 두절 된지 오래다.
만일 정말 만약에 내일 계엄군의 습격으로 내가 죽는다면 부모님이 퉁퉁 부어오른 나를, 지저분해진 나를 찾을 수 있을까.

1980년 5월 27일
새벽 2시 계엄군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탱크가 곳곳에 들어온 듯 했다.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으로 쏘고 때렸다. 도청 앞에서는 어떤 여자가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며 시민들에게 제발 우리를 도와달라고 외쳤다. 그 목소리가 고요한 새벽 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눈물이 계속 나왔다. 도청 안 사람들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며 우리 서로 살아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만일 누군가 죽는다면 꼭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주자고. 지금은 4시. 탱크들이 도청주변을 감쌌다. 이제 정말 나갈 수 없다. 나는 꼭 살아나갈 것이지만, 만약 내가 죽는다면 이 글이 꼭 가족의 품에, 친구의 품에 안겼으면 한다. 나는 무서울 따름이지, 절대 이곳에 남아있기를 후회하지 않는다. 도청 안, 멀리서는 총소리가 가득하다. 군화소리와 총소리는 점점 가까워 지겠지.

 

P 글, 편집 : 김예지 기자

LEAVE A REPLY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